| 제목 | 제34회 한터 백일장 작문 심사평 & 수상작 | ||
|---|---|---|---|
| 작성자 | 센터지기 | 등록일 | 2025.04.21 |
제34회 한터 백일장 작문 심사평 & 수상작 ◼︎ 제시어 국경 ◼︎ 심사평 이번 백일장 작문 제시어는 ‘국경’입니다. 두 음절 이상의 명사는 전형적인 작문 제시어 유형입니다. 두 음절 이상 단어가 작문 제시어일 때는 보통 해당 시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낱말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사 이슈에서 등장하는 단어는 물론이고 책, 영화, 드라마 ??문에 사람들이 많이 쓰는 단어, 유행어나 신조어 등이 모두 1차적인 출제 대상입니다. 세계화 시대를 역행하는 글로벌 차원의 변화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단어가 바로 ‘국경’입니다. 국경이라는 단어가 제시어라고 해서 모두 최근 벌어지는 관세 전쟁을 다루라는 뜻은 아닙니다. 준비생들 중에는 작문 제시어가 특정한 내용을 쓰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작문 출제자들은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 벌어지는 현상으로만 쓸 경우 내용의 차별성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해당 내용을 이미 많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뻔한 글’이 될 수 있습니다. 최우수작은 양극단의 시대에 국경이 맞닿은 점이지대가 극단적 대결과 갈등을 풀어나갈 ‘혁신적 대안’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차별성 있는 중심맥락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첫 문단에 등장하는 튀르키예의 사례는 적절하고 흥미롭습니다.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나 국내적 대결 상황으로 중심맥락을 전개하는 통찰력도 훌륭합니다. 우수작 1은 ‘보편이라는 독재’가 어떻게 다양성을 말살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통찰력 높은 에세이입니다. 우수작 2는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이 ‘방구석에 처박힌 아나키스트’가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 낸 매력적인 스토리입니다. 스토리가 갖춰야 할 개연성과 핍진성의 수준이 조금 더 높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글입니다. 우수작 3은 경제적 불평등이 체험 또는 경험의 비대칭을 얼마나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다룬 스토리입니다. 작문 백일장에 응모해준 모든 준비생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는 7월 제35회 백일장에서 또 만나면 좋겠습니다. ■ 최우수작 (임소윤) 국경이 맞닿은 점이지대는 뚜렷하게 어느 쪽이 아닌 애매한 양상을 보여 ‘회색 인간’ 취급받았다. 하지만 양극단의 시대에서 이들은 재탄생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열강 속에서 친서구 정책을 펼쳤다. 소련의 팽창을 두려워하며 NATO에 가입하기 위해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위험한 독자국보다 안정적이고 수동적인 ‘우방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2001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튀르키예만의 민족성인 이슬람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공존하는 국가를 고안해냈다. 강대국 중심에서 벗어나 다자주의, 적극적 평화 정책을 펼쳤다. NATO와 적대적인 러시아, 그리스와 우호적이면서도 주변 이슬람 국가 분쟁에 적극 관여했다. 점이지대를 애매한 위치가 아닌 세계의 ‘중재자’라는 독자적인 존재로 부활시켰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렸고, 튀르키예 1인당 국민소득을 3배로 끌어올리는 등 국가 성장까지 도모할 수 있었다. 경계와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극단의 협치를 지켜내야 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위협받는 모순적 구조에 놓여있다. 튀르키예의 성장은 강한 힘을 포기하면서 소수자를 지켜낸다는 용기에서 출발했다. 경계가 정체성으로 대표되지만 누구보다 경계를 흐리는 것에 집중한다. 마치 스턴트맨이 실제로 마주한 현실의 위험을 항상 감수하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목표는 허상과 현실의 구분을 지우기 위해 열심히 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매일 사고를 당할 위험을 경험하는 것으로 스턴트맨은 관객에게 타협점을 제공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선’ 위에 서고자 하는 이들은 어떤 목표의식이 있을까. 경계를 흐림으로써 기존 구조를 파괴하는 혁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휠체어를 끌고 열차와 승강장 경계에 버티고 있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멈춰있는 플랫폼과 움직이는 열차. 휠체어에서 끌어 내려지더라도 극단이 공존하는 세상을 바란다. 박경석이 억지로 점이지대가 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조화를 각인시킨다. 동시에 평화는 유약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다. 양극단으로 갈라져 서로의 이익만 외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다. 트럼프는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들에게도 가차없이 관세를 부과한다. 그들에게 관용이란 없다. 이제는 강력한 평화지대가 더욱 필요하다. 오랫동안 분단을 겪어 고립된 DMZ에 깨끗한 생태계가 찾아온 것처럼, 회색지대의 확산이 지금의 갈등을 멈추는 일이다. 잠시 서로의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거리를 인정하는 휴식이 필요하다. 협의를 추구하는 건 많은 힘이 요구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오염된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필수적인 길이다. 무서워서 이치와 상식을 포기한 자들은 무책임이라는 비범함에 안주한다. 인류 고립의 시대, 우리가 아니면 모두 적이 되는 사회가 다채롭기 위해 혁신적인 점이지대가 등장해야 한다. 무섭도록 커져가는 열차, 극단주의를 멈춰 세우기 위해 선 위에 설 때다. ■ 우수작1 (김혜린) 한때 인터넷에서 ‘스웨덴게이트’라는 괴담같은 이야기가 떠돈 적 있다. 스웨덴에선 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웨덴 친구 집에 놀러가면, 밥때가 됐을 때 친구가 ‘나 밥 먹고 올테니 방에서 기다려’라고 태연히 말한다는 것! 이 괴담같은 소문이 ‘콩 한 쪽도 나눠먹는’ 한국인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먹든 ‘한입줄까?’가 미덕이고 전통이며 ‘인의예지’인 우리나라의 문화로서는 그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경만 넘으면 내가 살아가며 받아들여온 배경이 달라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벽, 철조망, 혹은 출입국 심사대. 그 아무것도 아닌 선을 넘자마자 언어, 문화, 생활양식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쪽에선 불법이던 것이 비행기만 타면 저쪽에선 합법이 되는 세상에서, ‘보편’이란 것은 없다. 우리가 북유럽 사람들의 강한 개인주의 성향을 틀린 것이 아닌 다른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한국의 ‘정情’ 문화처럼, 나를 둘러싼 이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 인식론적 일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만 보편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보편을 강요하는 사회는 있다. 지방에서 발생해 지방에서 번지고 있는 산불 피해를 보도하며 ‘여의도 면적의 50배’가 탔다고 표현하는 언론은 수도권 중심 사회를 강요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힘들 때 지하철을 타고 한강에서 산책을 하곤 했던 내가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에게 자연스럽게 한강을 ‘관광’시켜 준 것도, 그리고 그 친구로부터 ‘서울에 사는 너는 그것만으로도 특권이구나’ 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랬던 내가 의자 등받이부터, 지도 앱의 걸음수, 약 복용량 등 일상생활의 전반이 ‘성인남성 기준’이라고 불평하는 것까지,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은 ‘보편적 기준’을 당연시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바야흐로 보편과 소수의 국경이 국가와 국가 사이 국경만치 뚜렷해진 사회, ‘보편성 권하는 사회’다. 그러나 보편성의 강요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편의 독재 속에서 다양성이 함락된 이 시대를 마주한다. 보편적 사상, 대중의 일반적 의지는 존재하고, 나의 의지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시대, 바로 파시즘의 시대다. 누군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보편으로 착각하는 순간 국경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곤 그 너머에서 나의 ‘보편적 민의’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시끄러운 사회에서 우리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말 그대로 ‘타인은 지옥’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편을 놓지 못한다. 획일화된 모습은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수단이며 보편의 상징, 효율의 집약을 드러낸다. 한 치의 다름없이, 어떤 공간 낭비도 없이 네모반듯하게 줄 세워진 아파트는 한국만의 관광지다. 개인도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 가장 보편적 기준, 효율성으로만 줄 세워지는 개인들은, 어쩌면 타인이라는 국경을 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닐까. 정체성은 지워진 채 획일화된 가치에서 뒤떨어질까봐 늘 전전긍긍하다 결국 내가 보편적 기준이니 나를 이해해달라고, 간절히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보편성으로 그들을 평가해야 하는가. ■ 우수작2 (박주연) 그는 방구석에 처박힌 아나키스트다. 그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오전 9시경, 일어나 샤워를 한다. 아침 겸 점심을 만들어 그날 뉴스를 틀어놓고 식사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는 화분에 물을 준다. 그러고 나면 12시쯤.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그는 번역 일로 먹고산다. 졸음이 몰려오는 오후 3시면 스르륵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청하고, 다시 일을 한다. 6시 반에는 저녁을 먹고, 그때부터는 완전한 자유 시간이다. 보통 책을 읽고, 가끔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의 책장에는 미하일 바쿠닌과 가네코 후미코 같은 아나키스트의 책이 빼곡하다. 반지하 방구석에 처박힌 지 어언 오 년하고도 여덟 달이 지났다. 그가 왜 방구석에 처박혔는지 알려면, 그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막 열한 살이 됐을 때, 재개발구역에 있던 그의 집은 강제 철거당했다. 포크레인이 그의 ‘집이었던 것’을 부수는 광경을 바라보며, 누가 어떤 권리로 그의 집을 부수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중학교 체육대회의 첫 순서는 국민의례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가슴에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는 담임선생님에게 많이 맞았다. 성인이 되어 입영통지서가 날아오자, 그는 군대에 가길 거부했다. 명령에 따라 누군가에게 총을 겨눠야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감옥에서 1년하고도 6개월을 살았다. 그는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모든 권력으로부터의 해방되길 원했다. 감옥에서 바쿠닌을 읽으며 홀린 듯이 아나키즘에 빠져들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깊은 무력감 끝에, 그는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적어도 제도에 편입되어 순응하며 살지 않겠다는 그만의 저항이었으며, 방구석 속 혁명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선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의 몸은 작디작은 나라의 경계 안에 갇혀버렸다. 그 선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였다. 그는 방구석에 처박힌 아나키스트였다. 어이없이 모든 걸 바꾼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독재자가 되고 싶었던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 수세에 몰리자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지막 트윗을 남기고 미사일 버튼을 눌렀다. 온 세상이 초토화됐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므로, 당연히 어떤 ‘선’도 남지 않았다. 우습게도, 방구석에 처박힌 아나키스트는 반지하에 살았기에 운 좋게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세상을 갈라놓던 모든 선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라지자, 그는 가방을 메고 화분 하나를 든 채 방구석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어 그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선이 그어져 있었던 자리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철조망과 초소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무지가 된 그곳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 한때 그곳에 존재했던 선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그리고 쭈그려 앉아 방구석에서부터 안고 온 화분을 옮겨심는다. 이 나무가 아주 크게 자라 모든 걸 덮고, 누구도 다시는 그곳에 선을 그을 생각도, 미사일을 쏠 생각도 하지 못하길 바라면서. ■ 우수작3 (이윤원) “오늘 4시에 면접 보기로 했던 아르바이트 지원자입니다.” 검은 단색 바탕에 깔끔한 명품 로고가 적혀있는 가방, 그것에 비해 화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금색의 목걸이. 겉으로 단조롭게만 보였던 그녀의 코트 역시 고가 브랜드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와 동갑인 그녀가 낸 이력서에 따르면, 여기 편의점 근처에 있는 명문대에 재학 중이라더라. 무슨 연유로 고액의 과외는 내버려 두고 여기에 온 것인지는 몰랐지만, 도무지 뽑지 않을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유일하게 걸렸던 점이라고는 그동안 짧게 짧게 여기저기서 일을 해왔다는 점. 그래도 최소 6개월은 일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장담하던 그녀였다. 근무 시간을 맞추고 그녀에게 가볍게 포스기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기도 정확히 닷새 전, 나는 곧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시던 대학 생활 이야기 덕에 대학 캠퍼스 낭만은 부풀어 올랐지만, 차마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내게 대학 생활은 다른 세상이었다. 하루빨리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벌고자 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직은 수중에 없는, 며칠 뒤 받게 될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나에게, 비교적 단조로운 이 일은 적당히 걸맞은 자리였다. 편의점이 한가로울 때에도 내 맘은 늘 생계와 시험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 큰 한숨 내뱉기 힘들었다. 그런 나날을 보낸 지 1년을 훌쩍 넘어가다 보니 점주님은 누구보다 날 신뢰했다. 자연스레 아르바이트 지원자들의 면접은 내 몫이 되었다. 직전 근무자였던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와 제일가는 대학 생활을 즐기던 그녀와 난, 닮은 구석 하나 없었다. 그나마 통하던 부분이라곤 내가 꿈꾸던 대학 낭만을 그녀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점 하나. 그렇게 그녀의 대학 얘기를 들으며 그녀의 삶에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말 한마디가 날 막아 세웠다. “난 나와 다른 삶을 체험해 보는 것을 가장 값지게 생각해.” 아이스크림 가게와 고깃집 서빙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 이곳, 나의 영역에 들어선 이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비전까지 납득되진 않았다. 애석하게, 나는 그녀의 여유로운 환경, 명문대 생활, 어느 것 하나 체험할 수 없었던 탓이다. 편의점으로부터 5분 거리의 대학 정문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아슬이 지켜 온 내 삶이, 누군가에겐 신선놀음하듯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바랜 국경 너머의 나라라니.” 어떠한 장벽 하나 없이 내 삶을 꿰차려 나선 그녀가 괜스레 괘씸했다. 경제적 불평등. 가진 것의 차이는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하지만 체험의 비대칭성. 새로운 불평등에 대해선, 익숙해지기엔 너무 조용한 상처였다. 보름이 지나서였을까. 점주님은 내게 새 아르바이트 면접을 봐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녀는 갑작스레 교환학생에 가게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더라. 그녀는 다시 한번 새로운 체험을 향해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는 편의점의 얄팍한 문이 아니라, 대담하게 국경 저 너머의 땅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그녀 입가엔 언제나 미소가 번져있었다. 늘 근심으로 가득 차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던 나와는 달랐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내 삶을 체험하지 못했다. 하는 일은 같았지만, 결코 갑갑한 삶과 마음의 무게까진 체험하지 못했으리라. 진정으로 체험했다고 믿고 있을 그녀의 비전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굳어 있던 내 얼굴에 작지만 깊은 웃음이 지어졌다. 적어도 체험은 모두에게나 평등하다고 기어이 증명해 낸 듯 말이다. 눈치 없이 라디오에선 치킨집 아르바이트 일일 체험을 하고 있는 한 ‘강남 좌파’ 정치인의 인터뷰가 들려온다. 다음은 편의점 야간 알바라고 선언하는 그였다. “불평등을 타파하겠다던 이가 또 다른 불평등을 부추기려 드네.” |
|||
